눈뜸과 눈멂의 계보학 Généalogie de l’oeil ouvert et de l’oeil fermé

드물고 고귀한, 헤프고 남루한 1
눈뜸과 눈멂의 계보학 : 하나의 시점, 두 개의 시선, 세 개의 시각 (1)

par CHOE Jeong-u

0. 미학과 정치의 풍경들을 위한 불가능한 지도제작법

2011년 여름, 명동, 동시대의 한 풍경

나는 위의 저 작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나의 이 연재를 시작하려고 한다. 그리고 또한 나는, 내가 바로 저 한 장의 작은 사진으로부터 이 연재를 시작하려고 한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 이 글을 막 읽기 시작한 당신에게 먼저 용서를 구하려고 한다. 이 글은 이렇듯 하나의 용서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무엇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하면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당신은 지금 여기서 무엇을, 나의 어떤 부분을 용서해야 하는가. 내가 이 한 장의 사진으로써 당신이 당신의 안락한 의자에 앉아 안락한 화면을 통해 안락하게 글을 읽는 일을 방해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또한 내가 이 한 장의 사진으로써 당신이 당신의 그 안락함에 수치심을 느끼게 했다는 사실을, 당신은 가장 먼저 용서해야 한다.
당신이 소위 ‘용역 깡패’의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라면, 이 한 장의 사진을 통해 그들의 외형과 분위기를 잘 숙지하기 바란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당신이 언젠가 저들을 바로 당신의 생활공간 안에서 맞닥뜨릴 수 있다는 ‘희박한’ 가능성을 거론하며 당신을 겁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내 의도는 오히려 그 반대이다. 당신이 지금 당신이 앉은 곳에서 누리고 있는 어떤 안락함의 느낌은 바로 저 덩어리의 외형과 바로 저 질감의 분위기 위에서 비로소 유지될 수 있는 어떤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 다시 말해, 우리는 우리가 누구 때문에 [잘] 살고 있는지를 매순간 확인해야 하며 그와 동시에 저 덩치들에게 깊이 감사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것. 당신이 지금 누리고 있는 안락함이 가능한 이유는, ‘민중의 지팡이’라는 저 농담 같은 별명을 지닌 경찰이 밤낮없이 지켜주는 경찰국가 대한민국의 안정된 치안 때문이 아니라, 사유 재산 보호와 무한 이윤 창출이라는 세계화된 자본주의적 원리를 수호해주는 저 든든하고 건장한 용역 깡패들 덕분인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나 문제는, 이 모든 자본의 평화가 그들 때문도, 그들 덕분도 아니라는 것. 오히려 이 한 장의 사진 안에서 발견되는 저 커다란 덩어리들은 어쩌면 조악한 조연인지도 모른다는 것. 그러므로 나는 다시 고쳐 말해야 한다.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의 용서를 구하지 않는다고, 구하지 않고, 나는 그러한 용서를 당신에게 요구한다고.
다시 말해 이 글은 이렇듯 하나의 용서를 ‘요구하는’ 일로부터 시작되어야 할 무엇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하면서 존재한다, 그러나 또한 그렇게 존재하면서 부재한다. 왜 그런가. 이 나의 존재는 근본적이고 결정적으로 어떤 부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안락하게 채워지는 나의 존재란 저 사진 안에서 왜소하게 일그러진 한 부재의 존재에 빚을 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우리의 확고한 존재란 실은, 저 사진을 가득 채운 채 한 사람을 윽박지르고 있는 덩치들에 의해서 말소되고 삭제되고 있는 하나의 부재, 그 불편한 진실의 구심점이라는 존재 아닌 존재에 결정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저 한 장의 사진은, 곧 미감(美感)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 한 장의 거친 사진은, 그 자체로 가장 외설적인 이미지이다(그러나 오히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더더욱 우리는 이 사진 안에서 현재 우리의 ‘정치’가 발 딛고 서 있는 하나의 특정한 ‘미감’을 발견해야 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사진을 결코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 위압적인 복수(複數)와 위협 받는 단수(單數), 윽박지르는 다수(多數)와 구석으로 몰린 소수(少數)가 가장 거칠고 즉물적인 상징으로 드러나고 있는 이 한 장의 사진을(그러나 이 ‘상징’이란 또한 상징이 되기엔 너무도 적나라하고 직접적인 ‘현실’이 아닌가), 이 너무도 확실하고 확연한 한 장의 사진을, 우리는 결코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 한 번 더 반복해서 말하자면, 이 사진은, 그 자체로, 딱 그만큼의 의미에서, 가장 외설적이기 때문에. 내가 당신에게 용서를 ‘구하지’ 않고 ‘요구하는’ 이유, 마치 쉬운 용서를 베풀듯 이 외설적 장면으로부터 결코 고개를 돌리지 말고 이 외설 자체를 직시하라고 당신에게 요구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묻는다. 당신은 이 폭력적 외설의 장면을 마주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시작된 이 글은, 어쩌면 미약한 것, 가장 나약한 것일지 모른다. 그렇게 미약하고 그렇게 나약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 끝이 결코 창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인민과 노동자들을 향해 그리도 쉽게 발설되는 저 모든 권력의 헛되고 위선적인 약속들에 반대하듯, 나는 미약하기 그지없는 시작을 미끼로 어떤 창대한 끝을 허황되게 보장하는 저 속류 기독교주의로부터 결연히 단절할 것을 또한 당신에게 요구한다. 그러나 어떻게? 다시 한 번 사진에 주목해보자. 저 하얗디하얀 순백의 티셔츠를 단체로 맞춰 입은 덩치들이 약속하고 대변하는 사유 재산의 천년왕국과 이윤 창출의 창대한 끝을 어떻게 거부할 것인가. 나는 이러한 불가능을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과 함께 요구한다.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가능하게(자연스럽게) 보이는 것들이 어떤 불가능성(부자연스러움) 위에 있는지를, 이 모든 존재하는 것들이 어떤 부재하는 것 위에 있는지를, 끈질기게 물으려 한다. 그러나 이 끈질김은 아마도 지난한 길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내가 또한 당신에게, 당신과 함께 요구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지난한 여정이다.
그러나 동시에 또한 오해가 없기를 바란다. 나는 정치에 대한 글, 곧 좁은 의미에서의 ‘정치적’ 글은 쓰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 나는 정치만을 위한 정치적인 글은 결코 쓰지 않을 것이다. 저 한 장의 사진을 가장 외설적으로 파악하는 우리의 미감은 그 자체로 ‘이미-언제나’ 가장 정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하나의 취향이자 취미판단으로서의 미학이 특정한 정치의 ‘문화적’ 반영이라고 역설하지도 않을 것이며, 하나의 이미지와 그 이미지가 지니는 미학을 반드시 정치적으로 해석해야 함을 종용하고 강변하지도 않을 것이다. 문제는 전혀 다른 것이다. 하나의 미학이 특정한 정치적 체제의 반영인 것이 아니라, 반대로 하나의 정치가 특정한 미학적 체제의 효과인 것. 나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이 연재가 현재적 세태의 일단을 포착하여 분석하고 평가하는 시평(時評)이나 시론(時論) 형태의 칼럼이 되는 것을 경계하고 지양한다. 또한 같은 관점에서 나는 이 연재가 일반적 의미에서 일종의 대중문화비평이 되는 것 역시 경계하고 지양한다. 나는 노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시를 쓸 것이고, 이야기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소설을 쓸 것이며, 평가하거나 분류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비평을 쓸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텍스트로써 (미)완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만, 그 문자들이 궁극적으로 가리키는 것은, 모종의 깊은 해석적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상정된] ‘내용’이라는 글이 아니라, 우리의 미학적 체제가 어떤 식으로 구획되어 있고 포진되어 있으며 분할되어 있는지를 가리키는 지도라는 ‘형식’이 될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이 연재가 그러한 불가능한 지도를 제작하는 하나의 작도법이자 기호학이 되기를 바란다. 잇고 끊고 덧대는 것들의 미학, 느끼고 즐기고 고통 받는 것들의 정치. 우리가 몸담고 있고 또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러한 정치적 시대와 미학적 세계에 대한 물음들이 바로 내가 이러한 지도 제작법의 시도를 통해 목표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러한 나의 방법론을 ‘이데올로기적 지도 제작법(cartographie idéologique)’으로 명명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지도 제작법’의 모습이 지극히 이념적인 것이 되리라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이렇듯 어떤 것이 이념적이 될 것이라는 일종의 예언적 규정을 단지 ‘고백’이라는 수세적인 이름으로만 부를 수 없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이념이란, 생각하지 않는 자에게는 가장 고루한 유물이겠지만, 생각하는 자에게는 가장 물질적이고 가장 구체적인 무기이다. 말하자면, 나의 질문은 가장 소박하면서 동시에 가장 거대하며(그러나 우리의 삶이 정확히 그렇지 않은가), 그런 점에서 아마도 지독하게 이념적인 어떤 물음일지 모른다. 그 질문은 정확히 다음과 같다. 우리는 어느 정치적 시대를, 어떤 미학적 세계를 살고 있는가. 그러나 이 시대/시간에 대한 물음과 세계/공간에 대한 물음은 동떨어진 두 개의 다른 질문들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시공간에 관한, 곧 미학과 정치가 교차하고 있는 풍경들에 대한 단 하나의 질문이다. 나는 이 단 하나의 질문이 지닌 여러 개의 얼굴들을 또 다른 여러 개의 질문들로 다시 바꿔서 물어보려 한다. 아마도 이러한 중첩되고 교직되는 질문들의 구름이 내가 원하고 바라는 하나의 지도를 제작해줄 것이며, 나는 그러한 믿음 아래에서 이 연재를 시작한다.
그러므로 나는 앞으로 잇고 끊고 덧대는 것들의 미학, 느끼고 즐기고 고통 받는 것들의 정치, 그 미학-정치의 지도를 그리고자 한다. 그 지도는 결코 촘촘하지 않을 것이나, 오히려 그 성긴 구조와 구멍들을 통해 어떤 불가능성 위에서야 비로소 그려지는 하나의 지도를 의도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미학이란 단순한 [현대]예술론이 아니며 또한 여기서의 정치란 단순한 [실천]철학이 아니다. 지고의 미학은 드물고 고귀한 것, 지상의 정치는 헤프고 남루한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그러한 자연스러운 위계, 당연한 이분법 아래에서 우리는 무언가 많은 것들을 착각해 왔고 또 착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드물고 고귀한 것은 헤프고 남루한 것과 만난다. 그리고 그렇게 드물고 고귀한 것은 그렇게 헤프고 남루한 것을 통과할 때에만 비로소 바로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지고의 것은 지상의 나락으로 처박힌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몰락이나 전락 혹은 추락이 아니다. 나는 저 드물고 고귀한 것이 이 헤프고 남루한 것과 교차하고 충돌하는 ‘유물론적 미학’의 한 불가능한 형태를, 다시 말해, 시도하는 동시에 사라지지만 바로 그러한 사라짐 속에서만 오히려 가장 결정적이고 적극적으로 감행될 수 있을 미학-정치의 한 형태를, 이미지와 글쓰기가 병치되는 하나의 시공간 안에서 제시해보고자 한다.
하여 나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는 것이다, 그렇게 돌아가서는, 다시금 저 마주할 수 없는 사진을 마주하며 재차 물어보는 것이다. 저 사진은 어떤 종류의 공포를 유발하는가. 또한 저 사진은 어떤 종류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가. 그리고 저 사진은 어떤 종류의 행동을 요구하는가. 그러나 이 모든 물음들에 앞서 무엇보다 나는 가장 먼저 저 사진을 말 그대로 한 장의 ‘사진’으로 보기를 또한 요구한다, 당신에게, 그리고 당신과 함께. 이 일견 가장 ‘중립적’으로 보이는 요구 안에 어쩌면 가장 미학적이며 동시에 가장 정치적일 하나의 시선이 놓여 있을 것이며, 나는 바로 이러한 시선의 자리로부터 시작해서 또한 바로 그 자리로부터 이탈할 것이다. 나는 그렇게 이탈하면서 시작한다. 나는 지금 당신과 함께 바로 이러한 시작점 위에 서 있다.

1. 하나의 시점: 모든 것을 보는 눈

모든 것을 보는 첫 번째 눈: 타워크레인 위에서 이불 빨래를 널고 있는 김진숙. (ⓒ , 정지윤 기자)

그리하여 나는 다시 한 장의 사진에서 시작할 것이다, 이 사진에 덧붙일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물음을 던지면서: 저 높은 곳(위)에서 바라보는 이 세상(아래)은 어떤 모습일까. 그러나 나는 이 물음을 통해 전지적 능력을 지닌 신(神)의 시점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전제하거나 낭만적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한진중공업 정리해고에 반대하며 부산 영도조선소 크레인에 올라가 ‘고공 투쟁’을 한 지 174일째가 되었던 지난 2011년 6월 28일, 김진숙 민주노총 지도위원은 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6월 10일 희망 버스가 올 때 용역을 투입해서 조합원들을 끌어내리는 장면을 본 이후로 지금까지 잠을 한 시간도 못 잤다. 신경이 예민해져 있다. 위에서 그 광경을 다 봤으니 오죽하겠나.”1 이 말들의 마지막 문장이 나를 붙잡는다(그리고 이것이 바로 내가 그의 저 마지막 문장을 진하게 강조한 이유이다). 그러나 나는 알지 못한다, 저 위에서 이 아래의 그 모든 광경을 다 바라볼 수 있는 경험이 어떤 것인지를. 그러나 나는 또한 알고 싶어진다, 그 위에서 저 아래의 모든 움직임들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를. 이 단 하나의 절대적 시점이란 또한 얼마만큼의 절대적 고독을 전제해야 하는 것인지를, 나는 알지 못하며, 또한 그렇기에, 알고 싶어 한다.
그러므로 이러한 어떤 ‘무지’에서 촉발되고 또 그에 기반을 두는 이 ‘선망 아닌 선망’이란, 신의 시점을 갖고 싶다는 전능함에 대한 열망과는 전혀 다른 것, 그러한 전지적 시점에 대한 갈망과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다(여전히 ‘현재적’인 소설일, 그러나 그것이 여전히 현재적이라는 사실 그 자체가 가장 ‘불행한’ 소설이기도 할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속의 한 제목을 빌리자면, “잘못은 신에게도 있다”). 오히려 이러한 선망 아닌 선망은 이 아래의 ‘모든 것’을 바라보는 저 위의 전지적 시점이 지닌 어떤 절대적 고독감, 그 단 하나의 절대적 시점이 지닌 절대적인 무력감을 ‘선망’하고 있는 것. 그러므로 여기서 내가 왜 이러한 감정을 ‘선망 아닌 선망’이라는 역설적 언어로 표현했는지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혼자다, 그리고 우리는 여럿이다(이러한 수적(數的) 대비는 [단순히 ‘연대의 열정과 포부’를 표현하는 일 외에] 무엇을 뜻하는가). 우리는 그에게 가닿지 못한다, 하지만 그는 아래의 우리들을 바라본다(이러한 위계적 대비는 [단순히 ‘전능한 무력감’을 노출하는 일 외에] 또한 무엇을 뜻하는 걸까). 이 아래의 우리가 그에게 개미들 같은 존재일까, 아니면 저 위의 그가 우리에게 한 마리 개미 같은 존재일까(그리고 이 생물적 은유의 물음은 [단순히 ‘존재의 절대적 왜소함’을 비유하는 일 외에] 또한 과연 무엇을 뜻해야 하는 것일까)? 하여, 다시 사진을 바라본다. 그는, 어쩌면 너무나 ‘진부하게도’, 그저 이불 빨래를 널고 있다. 그는, 말하자면, 저 위에서, 여전히, 계속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 살아가야만 하는 것. 삶은 저 위에서도, 아래의 모든 광경을 다 바라볼 수 있는 저 높은 전지적 장소에서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어떤 것, 삶은 저 위에서라고 해서 결코 유예되거나 지연되거나 면제되지 않는 어떤 것이다. 따라서 “위에서 그 광경을 다 봤으니 오죽하겠나”라는 문장이 전해주는 하나의 불편한 진실의 가장 중요한 정체는 바로 이 어쩔 수 없는 삶의 지속성이며, 또한 그가 저 위에서 고독하게 맞서 싸우는 동시에 또한 바로 그것을 위해 싸우고 있는 것 역시 바로 이러한 끈질긴 삶의 지속성인 것. 이러한 삶의 성격을 우리가 새삼 알게 되고 되새기게 되는 것은, 바로 저 전도된 전지적 능력 때문, 곧 그 능력이 전지적이라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히려 단순히 ‘신적(神的)’일 수만은 없는, 바로 저 무능의 전능성 때문이다.

모든 것을 보는 두 번째 눈: 제러미 벤담이 고안한 파놉티콘의 설계도.

이와는 다른 또 하나의 ‘익숙한’ 전능의 시점이, 전혀 다른 의미에서의 ‘단 하나의’ 시점이, 저 크레인의 반대편에 존재한다. 이 시점은 일견 위계적 상하를 나누지 않는 수평적인 시점인 듯 보이지만, 오히려 상징적인 위와 아래를 내면화하게 만드는 힘을 갖고 있다(말하자면, 그 힘은 ‘알아서 기게’ 만드는 힘이다). 게다가 이 단 하나의 시점은 어쩌면 우리가 속한 시대 자체를 규정할 만큼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이 또 다른 절대적 시점은, 크레인 위의 김진숙이 그 아래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눈과는 전혀 다른, 하나의 중심부에서 모든 주변부들을 일별하고 감시하는 또 하나의 전지전능한 시점인 것. 그 시점은 바로 파놉티콘(Panopticon)의 시점이다. 미셸 푸코(Michel Foucault)는 『감시와 처벌: 감옥의 탄생』에서 제러미 벤담(Jeremy Bentham)이 구상했던 이 파놉티콘, 곧 ‘일망(一望) 감시 시설’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수감자는 권력의 자동적인 기능을 보장해주는 가시성의 의식적이고 영속적 상태로 이끌려 들어간다. 비록 감시 작용이 연속적이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 효과는 영속적이 되도록 하며, 또한 권력의 완성이 그러한 감시가 실제로 행사되는 일을 불필요한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건축적 장치는 권력을 행사하는 사람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어떤 권력 관계를 창출하고 유지하는 한 기계가 된다. 요컨대 수감자 스스로가 권력의 전달자가 되는 어떤 권력적 상황 속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 ‘일망 감시 장치(le Panoptique)’는 ‘봄-보임(voir-être vu)’의 짝을 분리시키는 하나의 기계이다. 즉, 주위를 둘러싼 원형의 건물 안에서는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완전히 보이기만 하고, 중앙부의 탑 속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결코 보이지는 않는다.”2 파놉티콘은 그 말 그대로 ‘모두를 볼(pan-opticon)’ 수 있으나 그 자신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그러나 반대로 그것이 감시하는 대상은 오직 자신이 누군가에게 보이고 있다는 시선만을 느낄 뿐 그 자신은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이고 효과적인 감시의 장치(dispositif)인 것.
이러한 파놉티콘의 시점과 기능은 통상 권력 작용의 내면화로 해석되고 또한 그러한 점에서만 강조되거나 반대되어 왔다. 그러나 여기서 그러한 ‘내면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물론 흔히 논의되듯 ‘권력의 시선’을 내면화하는 것을 뜻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그 시선의 대상이 되는 개인은 또한 바로 그 스스로가 저 권력적 시선의 전달자이자 담지자이자 실행자가 된다는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방법으로 근대적 권력의 작용은 가장 ‘완전’하게 ‘완성’된다는 것. 그러나 이 개인은 어떻게 ‘그러한 개인’이 되는가? 다분히 자기-관음증적 시점을 통해, 곧 가장 뒤틀린 나르시시즘의 시점을 통해, 다시 말해 일종의 폐안(閉眼)에 기초한 또 다른 개안(開眼)을 통해, 눈멂에 의한 눈뜸을 통해 그렇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시선의 내면화는 소위 권력자가 그 권력이 적용되는 자들에게 가하는 인격화된 ‘억압’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권력적 시선의 작용이 권력을 실행하는 자와 그 권력이 적용되는 자를 명확하게 가르는 표층적 ‘정치’와 표피적 ‘권력’의 층위에서 작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푸코가 파놉티콘이 지닌 이러한 ‘시선’의 성격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은, 권력을 실행하는 자가 권력이 적용되는 자에 비해 갖는 어떤 실체적인 우월성이 결코 아니다. 그 시선은 장치와 구조의 효과이다. 이 기계-장치의 바깥은 없으며, 그것을 ‘위’에서 조종할 수 있는 메타적인 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푸코는 지나치듯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하기야 이 건축적 장치의 한복판에 감금되어 있는 셈인 관리자 역시 이 장치와 연결된 부분적 존재가 아닐까? 전염이 확산되는 것을 방치하는 무능한 의사나, 서투른 관리를 하는 감옥이나 작업장의 관리자는, 전염병이나 폭동이 발생할 경우 첫 번째 희생자가 될 것이다. 일망 감시 장치의 경영자는 말한다. ‘나의 운명은 내가 고안할 수 있었던 모든 속박에 의해 그들(수감자들)의 운명과 함께 묶여 있다.’ 일망 감시 시설(le Panopticon)은 일종의 권력의 실험실로 기능한다.”3 이 부분은 파놉티콘의 정의와 기능에 대한 푸코의 가장 유명한 언급들에 비할 때 우리가 결코 자주 인용하거나 주목하지 않는 부분인데, 그러나 나는 당신과 함께 이 부분을 다시 읽어야 한다. 크레인 위에서 아래의 모든 것들을 바라보며 난감하고 착잡한 마음을 품었던 김진숙의 저 시점과, 주변부의 모든 것들을 감시하며 정작 그 자신은 결코 보이지 않는 파놉티콘 중심부의 시점 사이에 놓여 있는 어떤 괴리에 주목하기 위하여, 다시 말해, 둘 사이의 구조적 상동성과 차이점, 그리고 그 둘 사이의 감성적 거리와 대립들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렇다면 왜 이 둘은 구조적으로 상동적(相同的)인가. 모든 것을 한눈에 바라보는 ‘일망(一望)’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왜 그 둘은 구조적으로 차이가 나는가? 파놉티콘의 중심부는 모든 것을 보면서 그 자신은 보이지 않는 반면, 우리 모두는 크레인 위의 김진숙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여기서 다시 묻자면, 우리는 과연 그를 바라볼 수 있는가, 그의 모습과 정말로 마주할 수 있는가). 이 둘의 차이란 정치적인 감성의 차이가 아니라 감성의 정치라는 차이의 모습을 띤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어떤 정치를 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어떤 미학을 택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는 것. 이 두 미학적 시점은 공히 ‘모든 것을 보는 눈’의 형태를 띤다. 그러나 파놉티콘의 시점은 그 자신은 마치 ‘중립적’으로 ‘관조’하는 듯한 시선을 흩뿌리며 그 시선의 대상이 되는 개체를 관음증적 주체로 만드는 반면, 크레인 위의 시점은 그 모든 아래의 것들을 그저 관조할 수만은 없는, 위의 눈과 아래의 눈들이 모두 서로를 바라보고 바라볼 수밖에 없는 어떤 ‘거리의 관계성’을 만들어낸다. 만약 신의 시점이 있다면, 그리고 만약 그러한 시점이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신의 시점이란 이 둘 중 어떤 것이 되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아마도 답할 수 없을 것이지만, 또한 아마도 분명히 답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선택적’으로 한쪽이 될 수 있는 것일까. 혹은, 나는 이 두 개의 선택지가 마치 ‘선택 가능한’ 것처럼 말했지만, 이 선택은 정말로 그 자체로 ‘선택적’인가. 우리는 어쩌면 바로 이 지점에서 이 선택 가능한 선택지들의 ‘선택 불가능성’과 마주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폴리페모스의 눈을 찌르는 오디세우스.

따라서 우리는 선택이 자유로운 두 가지 미학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여 나는 여기서 김진숙이 올라가 있는 저 크레인 자체를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버리겠다는 사측의 발상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떠한 ‘미학’ 위에서 가능했는지, 어렴풋이 깨닫게 된다. (우리는 저 크레인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는 바다 쪽으로 옮기려는 어떤 시도가 있었음을 알고 있다. )4 그러한 발상을 떠올리게 한 사고의 바탕에 깔려 있는 미학적 의식과 무의식은 무엇인가. 감시할 수 없는 것, 오히려 모든 아래의 것들을 내려다보며 그 자신 역시 아래에 의해 보임을 받는/당하는 단 하나의 눈, 이 단 하나의 시점을 어떻게 다루려 하는가. 시야에서 치워버리는 것, 바다 쪽으로 보내서 그 역시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하게 하고 아래의 사람들 역시 그 위를 보지 못하게 하는 것, 곧 저 위와 이 아래의 모든 ‘거리의 관계성’ 자체를 제거하면 된다는 것. 모든 것을 바라보는 단 하나의 눈은 말 그대로 단 하나만 있으면 족하다는 것. 비록 그 눈의 자리가 텅 비어 있는 중심, 공동화된 핵심이라고 하더라도, 어쩌면 오히려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누군가에게 그 자신 외에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다른 눈 따위는 전혀 필요하지 않다는 것. 말하자면, 아래를 볼 수 없는 위와 위를 볼 수 없는 아래는 서로에 의해 망각된다는 것, 그러한 망각을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감시하고 규율하겠다는 것. 자, 그렇다면 여기서 오히려 저 파놉티콘의 눈에는 가장 강력하면서도 취약한 하나의 결정적 약점이 생기지 않는가. 마치 오디세우스에 의해 박탈당하는 외눈박이 폴리페모스의 눈처럼. 오디세우스 스스로가 폴리페모스에게 들려줬듯, 그는 ‘아무도’ 아니다. 크레인 위의 김진숙도, 그 아래에 있는 우리도, 파놉티콘의 시점에서는 정말 ‘아무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마르크스가 『헤겔 법철학 비판 서설』에서 썼던 말을 다시금 떠올린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리고 나는 모든 것이어야 한다(Ich bin nichts, und ich müßte alles sein).” 우리는 아무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오히려 우리가 아무도 아니며 아무것도 아니라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또한 모든 것이 되고, 또 모든 이가 되어야 한다.

  1. 김윤나영 기자의 기사 「“회사에 버림받고 노조에 버림받아 죽고 싶은 생각뿐”」 참조: http://www.pressian.com
  2. 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 naissance de la prison, Paris : Gallimard, 1975, pp. 202-203; 오생근 옮김, 『감시와 처벌』, 나남, 2003[개정판], 311-312쪽, 번역은 일부 수정.
  3. Michel Foucault, Surveiller et punir: naissance de la prison, p. 206; 오생근 옮김, 『감시와 처벌』, 316-317쪽, 번역은 일부 수정.
  4. 기사 참조: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88411.html

Le CRIC, centre de recherches internationales sur les Corées, est l’éditeur de la revue tan’gun (site et papier). Ce centre de recherches est une association de loi 1901 à but non lucratif, tournée entièrement vers l’étude des trois Corées et le développement des moyens de cette étude, en particulier les voy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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